1984년, 소니는 할리우드를 상대로 대법원에서 이겼다. 비디오 레코더를 저작권 침해 도구로 규정하려던 시도를 막아낸 승리였다. “기술은 중립적이다, 합법적 용도가 있다면 불법 사용 가능성만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원칙을 세운 판례. 그런데 40년이 지나, 그 원칙이 소니 자신을 향해 날아왔다. 음원 불법 공유자들을 인터넷에서 퇴출시키려던 소니의 시도가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됐다. 근거는 베터맥스 판례. 아이러니가 이 정도면 거의 반전 드라마 수준이다.
소니 vs. 콕스: ISP가 ‘인터넷 경찰’이 되어야 하나
싸움의 시작은 콕스 커뮤니케이션즈(Cox Communications)였다. 소니 뮤직을 포함한 여러 음반사들이 이 ISP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논리는 단순하다. 콕스가 수십만 건의 저작권 침해 통보를 받았는데도 상습 불법 공유자들의 인터넷 접속을 차단하거나 계정을 끊지 않았다는 것. 음반사들 입장에선 “막을 수 있었는데 안 했다”는 주장이다.
- 소니의 주장: ISP는 반복적인 저작권 침해자들의 접속을 차단해야 한다.
- 콕스의 반박: 자신들은 DMCA(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취했으며, 모든 침해 행위를 완벽히 막는 것은 불가능하고 과도한 부담이다.
- 하급심 판결: 콕스의 저작권 침해 방조 책임을 인정, 10억 달러(약 1조 3천억 원)에 달하는 배상금 판결.
1심에서 콕스는 졌다. 1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조 3천억 원짜리 배상 판결이 나왔다. 묵직한 숫자다. 그런데 항소심에서 뒤집혔다. 결국 대법원도 소니의 상고를 기각하며 콕스 손을 들었다. ISP가 저작권 침해를 방조했다는 법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판단이다.
베터맥스 판례의 역습
이번 판결에서 콕스를 살린 논리가 소니가 1984년에 직접 세운 베터맥스 판례라는 게 묘하다. 당시 소니는 비디오 레코더가 TV 프로그램 녹화에 쓰인다고 저작권법 위반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타임 시프팅(time-shifting)’, 보고 싶은 시간에 보려고 녹화하는 개인 용도는 합법이라고. 대법원이 이를 받아들였고, 소니는 이겼다.
40년 뒤, 같은 논리가 ISP에 적용됐다. 인터넷 서비스 자체는 불법 공유 말고도 수천 가지 합법적 용도로 쓰인다. 법원은 ISP에게 모든 사용자의 활동을 감시하고 침해 여부를 판단해 즉각 조치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베터맥스 판례의 정신과 충돌한다고 봤다. 인터넷 생태계 전반에 과도한 부담을 준다는 것도 이유가 됐다. 소니가 세운 원칙이 소니를 막은 것이다.
콘텐츠 창작자들, 이제 어쩌나
음반사들 입장에서는 쓴 패배다. 온라인 불법 복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ISP 협조 없이 대규모 차단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번 판결로 그 협조를 법적으로 강제할 수단을 하나 잃었다.
콕스 같은 ISP들은 한숨 돌렸다. ‘인터넷 경찰’ 역할을 강요당할 뻔했는데, 일단 피해갔다. 법적 책임 범위가 어느 정도 윤곽을 잡은 것도 이들에게는 반가운 부분이다.
창작자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크게 둘이다. 기술적 보호 조치를 강화하거나, 불법 복제의 유인을 줄이는 비즈니스 모델을 찾거나. 후자는 이미 스트리밍 서비스들이 증명했다. 월정액 구독이 생기면서 굳이 불법 파일 찾아 헤매는 사람이 줄었다. 결국 편의성 싸움이다.
국내 ISP와 저작권 분쟁, 파장은
미국 대법원 판결이 국내 법원을 직접 구속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글로벌 판례는 국내 분쟁에서 참고 자료로 쓰인다. SKT, KT, LG U+ 같은 국내 ISP들도 저작권 침해 콘텐츠 유통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현행 한국 저작권법에는 ISP 면책 조항이 있지만, 일정 요건 하에 기술적 조치나 접속 중단 의무도 부과된다.
- 국내 ISP: 미국 판례를 근거로 저작권 침해 방조 책임 경감을 주장하는 논거가 생겼다. 국내 저작권 단체와 분쟁이 생길 경우 실질적인 방어 근거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 콘텐츠 제작사: 해외 사례를 바탕으로 국내 ISP에 더 강한 저작권 침해 방지 노력을 촉구하는 배경이 생겼다. 동시에 자체 보호 기술 개발이나 유통 플랫폼과의 협력 강화 쪽으로 전략을 선회할 가능성도 있다.
- 사용자: ISP의 무분별한 계정 정지나 검열에 대한 우려는 다소 줄어들 여지가 생겼다. 단, 불법 복제 자체는 여전히 범죄다. 이 부분은 변하지 않는다.
소니 대 콕스 소송은 결국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인터넷이라는 도로를 깔아준 사람이, 그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범죄에 책임을 져야 하나. 당장 답이 나올 질문이 아니다. 법도, 기술도, 비즈니스 모델도 계속 바뀌고 있으니까. 국내에서도 이 논의가 언젠간 다시 불붙을 것이다. 아마 다음 소송이 불씨를 당길 것이다.
출처: Ars Technic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