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트레일스, 걷기 속 과학과 역사…인간의 본질은?

로버트 무어의 저서 '온 트레일스'는 걷기 속에 숨겨진 과학, 역사, 철학을 탐구합니다. 디지털 피로 시대, 한국의 '걷기 열풍'과 아웃도어 시장에 어떤 영향을 줄지 주목됩니다.

허리 통증이 생기고 아이가 둘이 되면, 배낭을 메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더 버지(The Verge)>가 소개한 한 작가의 얘기다. 직접 트레일을 걷는 대신, 그는 책 속에서 ‘길’을 찾았다. 선택한 책은 로버트 무어의 ‘온 트레일스(On Trails: An Exploration)’. 이 책이 왜 그 대안이 됐는지는 읽어보면 바로 안다.

등산 에세이가 아니라, 길의 철학서다

‘온 트레일스’를 아웃도어 경험담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저자 로버트 무어는 ‘길’이라는 개념 하나를 붙잡고 과학, 역사, 철학을 전부 끌어들인다. 동물의 이동 경로에서 시작해 고대 인류의 발자취, 현대 도시의 복잡한 네트워크 구조까지 — 범위 자체가 굉장히 넓다. 길 하나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담길 수 있다는 게 읽으면서 계속 놀랍다.

개미 페로몬, 신경망, 로마 도로 — 다 ‘길’ 이야기다

무어의 시각이 독특한 건, 길을 단순한 ‘통로’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미가 먹이를 찾아 이동하면서 남기는 페로몬 경로 — 이건 사실 정교한 집단 최적화 시스템이다. 개미 한 마리는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는데, 수천 마리가 움직이면 효율적인 길이 생긴다. 무어는 여기서 인간의 뇌 속 신경망 이야기로 넘어간다. 생각이 형성되고 강화되는 과정 — 이것도 결국 ‘길’이 만들어지는 원리와 같다는 거다. 처음엔 이건 좀 억지스러운 비유 같기도 한데, 읽다 보면 납득이 된다.

역사 파트도 꽤 묵직하다. 고대 로마의 도로망이 제국의 팽창과 붕괴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동 경로가 훗날 국경선의 토대가 된 사례까지. 길 하나에 정치, 군사, 문명이 전부 얽혀있다는 걸 보여준다. 지도를 보는 시각 자체가 바뀌는 느낌이다.

걷고 싶은데 못 걷는 사람들에게

요즘 ‘디지털 디톡스’는 거의 상식이 됐다. 스크린을 끄고 밖으로 나가라는 말은 넘쳐나는데, 현실적으로 못 나가는 상황도 많다. 부상이든, 육아든, 시간이든. ‘온 트레일스’는 그런 상황에 꽤 괜찮은 출구가 된다. 직접 산을 오르지 않아도, 무어의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는 게 느껴진다.

‘느리게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 책은 설명보다 경험으로 전달한다. 빽빽한 일정 속에서 읽으면 오히려 대비가 더 선명해진다. 이건 좀 이상한 역설이지만 실제로 그렇다.

한국 독자에게 통하는 이유

한국은 등산 문화가 유독 강한 나라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은 매년 수십만 명을 끌어모으고, 코로나19 이후로는 맨발 걷기, 숲길 산책 같은 저강도 야외 활동도 빠르게 퍼졌다. 운동이기도 하지만, 힐링과 의미를 동시에 찾으려는 욕구가 더 크다. 그냥 걷는 게 아니라, 걷는 행위에서 뭔가를 건져 올리고 싶은 거다.

‘온 트레일스’는 그 욕구를 정확히 건드린다. 걷는 행위에 과학적·역사적 맥락을 얹어주니까. 아웃도어 콘텐츠가 이미 포화 상태인 시장에서, 이런 인문학적 접근은 분명히 차별점이 있다. 관련 트레킹 프로그램이나 관광 상품 기획에도 영감이 될 결이다.

걷기를 좋아하든, 책을 좋아하든, 아니면 그냥 현대 문명의 속도에 지쳐있든 — 이 책은 여러 지점에서 잡아당긴다. The Verge가 주목한 이유가 있다.

출처: The Verge

글로벌뉴스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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