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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피지가 뭐길래, 그 안에서 천년 전 바이러스까지 나왔을까

    중세 수도사들이 양가죽을 펴서 필사본을 만들던 그때, 몇백 년 뒤 과학자들이 그 가죽에서 바이러스 유전자를 꺼내 볼 줄은 몰랐을 거다. 최근 고문서 분석 연구에서 양두창(sheeppox) 바이러스의 유전 흔적이 나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도서관과 고문서 보관소가 사실상 거대한 생물학 타임캡슐이라는 이야기, 처음 들으면 좀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다. 양피지가 정확히 뭔지, 이런 분석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이게 왜 흥미로운지 하나씩 짚어봤다.

    양피지, 종이랑 뭐가 다를까

    양피지(parchment)는 종이가 널리 쓰이기 전, 중세 유럽에서 책이나 문서를 만들던 재료다. 이름만 보면 양가죽만 쓴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양, 염소, 송아지 가죽을 얇게 펴서 말린 것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동물 가죽을 석회수에 담가 털을 제거하고, 나무 틀에 팽팽하게 당겨 말린 다음 표면을 갈아내는 과정을 거친다. 이렇게 나온 양피지는 습기와 곰팡이에 강하고, 수백 년이 지나도 잘 바스러지지 않는다. 유럽 곳곳 수도원과 대학 도서관에 남아있는 중세 필사본 대부분이 이 재료로 만들어졌다.

    동물 가죽이라서 가능한 일 – DNA가 그대로 남는 이유

    종이는 식물 섬유지만, 양피지는 동물의 진피층, 그러니까 살아있던 조직 그 자체다. 가죽으로 가공되면서 세포는 죽지만 콜라겐 단백질과 DNA 조각은 구조 속에 상당 부분 갇혀 남는다. 건조하고 서늘한 도서관 환경이면 이 상태가 수백 년, 심지어 천 년 가까이 유지되기도 한다. 그래서 양피지 한 장에는 원료가 된 동물의 유전 정보뿐 아니라, 그 동물이 죽기 전 앓았던 병원체의 유전 정보까지 함께 남을 여지가 있다. 중세 필사본에서 양두창 바이러스 흔적이 나온 것도 이 원리 덕분이다.

    고문서에서 바이러스를 어떻게 찾아낼까

    예전에는 가죽 재질을 확인하려면 문서 일부를 잘라내야 했다. 파괴적인 방식이었다. 요즘은 지우개로 살짝 문지르는 정도의 마찰만으로 미세한 단백질 조각을 채취하는 비파괴 분석법(eZooMS)을 쓴다. 이렇게 얻은 시료로 먼저 단백질을 분석해 어떤 동물 가죽인지 확인하고, 이어서 남아있는 DNA를 증폭·시퀀싱해 유전체 조각을 재구성한다. 문제는 오염이다. 수백 년간 여러 사람 손을 거친 문서라 현대인의 DNA나 세균이 섞이기 쉽다. 그래서 연구팀은 대조군 시료와 통계적 필터링을 거쳐 진짜 고대 병원체 유래 서열만 걸러내는 데 공을 들인다.

    도서관이 ‘생물학 타임캡슐’로 불리는 이유

    중세 필사본은 대개 제작 연도와 지역이 문서 자체에 적혀 있거나, 필체와 양식만으로도 연대가 꽤 정확하게 추정된다. 화석이나 발굴 시료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인 셈. 유럽에 남아있는 중세 양피지 문서만 수백만 장 단위로 추산된다. 그 한 장 한 장이 특정 시기, 특정 장소에서 살았던 동물의 생물학적 기록이라는 뜻이다. 도서관, 고문서 보관소, 교회 문서고까지 합치면 아직 손대지 않은 유전 정보 저장고가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는 셈이다.

    이 연구, 실제로 어디에 쓰일까

    옛날 동물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아는 데서 끝나는 얘기가 아니다. 바이러스는 계속 변이하니까, 수백 년 전 유전체와 지금 유전체를 비교하면 진화 속도와 변이 경로를 훨씬 정밀하게 짚어낼 수 있다. 이런 자료는 이런 식으로 쓰인다.

    • 가축 전염병(양두창, 우역 등)의 장기적 확산 경로 추적
    • 인수공통감염병이 언제, 어떻게 갈라져 나왔는지 계통 분석
    • 현대 백신·방역 정책 수립을 위한 기초 데이터 확보
    • 고고학·역사학 자료와 결합한 과거 기후·무역로 재구성

    양두창 바이러스는 천연두 계열과 가까운 친척뻘이다. 이런 사촌격 바이러스들의 옛 유전체를 확보할수록, 이미 박멸된 천연두가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거꾸로 추론할 재료도 늘어난다.

    이것도 궁금하죠?

    Q. 양피지에서 나온 바이러스, 지금도 위험한가?
    A. 양두창은 양과 염소 같은 가축에만 감염되는 바이러스다. 사람한테는 옮지 않는다. 연구 목적도 감염 위험이 아니라 바이러스의 진화 계보를 추적하는 데 있다.

    Q. 아무 고문서나 이런 분석이 가능한가?
    A. 보존 상태가 관건이다. 습도가 높거나 화재·수해를 겪은 문서는 DNA가 이미 분해됐을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건조한 환경에서 오래 보관된 문서일수록 성공 확률이 높다.

    Q. 굳이 유럽 문서만 대상이 되나?
    A. 원리상 동물 가죽이나 뼈, 뿔로 만든 유물이면 어디든 적용 가능하다. 가죽 갑옷, 북, 활집처럼 국내 박물관에 남아있는 유물들도 이론적으로는 같은 방식의 분석 대상이다.

    결국 문서 보관소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

    고문서 연구자와 생물학자가 한 팀을 이루는 일, 앞으로 더 늘어날 것 같다. 역사학 자료로만 여겨졌던 필사본 한 장이 생물학 실험실에서는 유전자 저장 매체가 되는 셈이다. 오래된 책이나 가죽 문서를 낡은 유물로만 보지 말고, 그 안에 어떤 과거의 흔적이 잠들어 있을지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하다.

    출처: Ars Techn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