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선 유지보수용 장비가 드론 음악의 음원이 된다. 의료용 오실로스코프가 비주얼 악기로 둔갑한다. 독일 출신 실험 음악가 하인바흐(Hainbach, 본명 Stefan Paul Goetsch)의 작업실 풍경이 딱 이렇다. 더 버지(The Verge)가 최근 그와 나눈 인터뷰를 보면, 창작 철학부터 좋아하는 게임까지 꽤 깊이 들어가는데요. 읽다 보면 ‘악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슬그머니 올라온다.
신시사이저의 ‘다크소울’을 자처하는 남자
하인바흐가 자기 제작 방식을 설명할 때 쓰는 표현이 있다. “신시사이저의 다크소울(Dark Souls of synthesis)”이라는 말이다. 전화선 테스트 장비, 오래된 의료 기기, 산업용 신호 발생기 같은 걸로 음악을 만드는 방식을 두고 하는 말인데, 일반 신디사이저보다 조작이 훨씬 까다롭고 원하는 소리 하나 뽑으려면 수십 번은 건드려야 한다. 그걸 알면서도 일부러 선택했다는 게 포인트다.
그가 말하는 “하드 모드(Hard Mode)” 제작 기법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편한 도구를 쓰면 빨리 끝나지만, 제약이 많은 장비에서는 예측 못 한 음색이 튀어나온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아니라, 불편함 안에서 독창성을 캐내는 거다. 이건 좀 과한 듯 싶다가도, 결과물을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전화선 장비가 악기가 되는 순간
유튜브 채널을 틀면 이 철학이 실제로 어떻게 굴러가는지 볼 수 있는데요. 전화망 유지보수용 테스트 기기에서 드론 사운드가 나오고, 오실로스코프가 비주얼 퍼포먼스 도구로 바뀐다. 이른바 ‘재목적화(repurposing)’인데, 이걸 이렇게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은 드물다.
이 장비들, 이베이나 중고 전자 장터에서 수만 원이면 산다. 근데 이걸로 만들어내는 사운드 텍스처는 어디서도 못 들어본 것들이거든요. 하인바흐는 이를 두고 “장비의 한계가 곧 음악의 개성이 된다”고 표현한다. 맞는 말이다.
- 전화선 테스트 장비 → 드론·앰비언트 음원
- 산업용 오실로스코프 → 비주얼 퍼포먼스 도구
- 구형 의료 기기 → 예측 불가능한 필터 효과
젤다: 야생의 숨결이 알려준 탐험 감각
인터뷰에서 가장 예상 밖이었던 건 닌텐도 게임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 얘기였다. 하인바흐는 이 게임에서 창작 영감을 얻는다고 했다. ‘야생의 숨결’의 오픈 월드 감각, 어디로 가도 되고 뭘 해도 되는 그 자유로운 구조가 자신의 음악 방식과 겹친다는 거다. 솔직히 처음엔 뜬금없다 싶었는데, 설명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됐다.
정해진 시나리오 없이 지형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절경을 마주치는 것처럼, 하인바흐의 음악도 정해진 악보 없이 장비를 만지다가 우연히 튀어나오는 소리에서 시작될 때가 많다. 목적지를 안 정하고 떠나는 창작 여정. 게임과 음악이 이런 식으로 연결될 줄은 몰랐다.
스위스 아미 나이프 — 다목적 장비 철학의 실체
인터뷰 제목에 나오는 ‘스위스 아미 나이프’는 그의 장비 선택 철학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칼 하나에 기능이 10개 달린 것처럼, 그가 고르는 장비들도 단일 용도가 아니라 여러 방식으로 쓸 수 있는 것들이다.
비싸고 용도가 고정된 플러그인 신디사이저 대신 싸고 유연한 아날로그 장비를 선택하는 것. 장비 하나로 드론도 만들고, 리듬 소스로도 쓰고, 피치를 뒤틀어 효과음으로도 활용한다. 예산이 빠듯한 인디 뮤지션 입장에서 보면 꽤 실용적인 접근인데요. 고가 신디사이저 대신 이베이에서 건진 수만 원짜리 테스트 장비를 쓰는 셈이니까.
유튜브가 만든 실험음악의 새 문법
하인바흐가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는 이 복잡한 제작 과정을 유튜브로 투명하게 공개한다는 점이다. 채널이 단순한 음악 감상 창구가 아니라 사운드 디자인과 실험 음악을 배울 수 있는 자료 창고에 가깝다.
구독자들은 완성된 음악뿐 아니라 ‘실패한 소리’, ‘우연히 나온 텍스처’, ‘장비 세팅 과정’까지 함께 본다. 이 과정에서 실험 음악의 진입 장벽이 확 낮아지는 효과가 생기는데요. 어렵고 난해하게만 느껴지던 아방가르드 사운드가, 영상 하나로 “나도 해볼 수 있겠는데”라는 인식으로 바뀌는 거다. 유튜브가 장르의 문법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게 과장이 아니다.
국내 인디 씬이 건져야 할 것들
한국에도 실험음악 신은 있다. 근데 주류 음악 시장에서 크게 얼굴을 못 내미는 게 현실이고, 많은 뮤지션들이 “콘텐츠로 어떻게 살아남을까”를 고민한다. 하인바흐의 사례는 구체적인 힌트 몇 가지를 던진다.
- 장비 접근성: 고가 신디사이저 없이도 중고 산업 장비로 독창적 사운드 구현 가능
- 유튜브 전략: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을 콘텐츠로 만드는 접근
- 장르 초월: 실험음악이 게임 OST, 영화 음악 등 상업 영역과 교차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 글로벌 유통: 밴드캠프나 유튜브를 통해 언어 장벽 없이 세계 청중에게 닿는 구조
결정적으로, 하인바흐가 증명한 건 ‘비싼 장비 없이도 된다’는 게 아니다. ‘남다른 시각으로 도구를 보면 남다른 소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실험적 사운드를 추구하는 뮤지션들, 그리고 유튜브로 음악 콘텐츠를 운영하는 크리에이터들에게 하인바흐의 작업 방식은 하나의 레퍼런스가 될 만하다. 주류가 아닌 곳에서 출발해 전 세계 청중을 찾아낸 그의 경로가, 지금 국내 인디 씬이 안고 있는 질문과 정확히 겹친다.
출처: The Verge
